살랑 살랑. 기분 좋은 바람이 나의 볼을 스친다. 어느 덧 밤의 어둠이 느릿하게 하늘을 덮어가고 있는 것이 보인다. 나는 그에 어울리는 검은 양복을 차려입고는 하늘을 향해 엷게 웃어보였다. 오늘은 결혼식이다. 우리는 졸업했다. 3년 동안의 고등학교 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그리고 각자 자신의 길로 들어선 친구들은, 누군가는 일터에서, 누군가는 대학교에서, 누군가는 외국에서. 미래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며 서서히 분리된 생활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나는 파리를 떠나지 않고 여전히 머물렀다. 그야, 나는 파리를 지켜야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에. 물론 그 외에도 굳이 파리를 떠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기 때문도 있다. 나는 대학에 다니면서 여전히 아버지를 도와 모델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파리를 떠나고..
온 세상의 소리를 다 잡아먹은 듯 어두운 밤하늘에 내려앉은 작은 별무리를 바라보며, 제 발소리만이 조용히 울려퍼지는 밤거리를 뛰어다니는 사람. 발을 디디는 곳이 인도가 아닌 지붕과 허공이고,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는 대신 히어로물에서나 등장할 법한 붉은 수트를 입고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평범한 사람. 건물과 건물 사이를 날아다니고, 모두가 잠든 이 도시의 평화를 위협하는 악당이 없는지 정찰하는― “팀장님!” 헉, 하고 참았던 숨을 들이마쉼과 동시에 반사적으로 어깨를 흔들어 나를 깨운 사람을 바라보았다. 눈 앞에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직장 동료이자 오랜 친구인 N이었다. 지금 내가 뭘하고 있었더라? 지끈거리는 이마 양 쪽을 왼손으로 꾸욱 누르며 눈 앞의 서류를 뒤적거렸다. 얼마나 오래 잠들었던지, 가동 중..
변신, 블랙캣! 그것은 아드리앙이라는 따스한 조각을 꿰매어 입은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마법의 주문과도 같은 말. 그 한 마디면 자신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블랙캣이라는 영웅이 될 터였다. 매일 같이 외치던 짧은 두 단어. 언제나 같은 느낌. 그러나 눈 앞에 놓인 광경이 일상적이지 않았다. 그 앞에는 햇살과도 같은 금발과 초여름의 풀내음보다도 짙은 초록색의 고양이 눈을 가진 남자가 서있었다. 까만 고양이 귀와 어둠에 녹아들만한 검은색의 수트를 입은 사람. 여유로운 웃음으로 자신을 향해 몸을 숙여 인사하는 그 사람은. “안녕하신가요, 아드리앙 아그레스트씨~?” 블랙캣이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해? 플랙, 플랙! 무언가 잘못 되었다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기에, 조금은 애처롭고 급하게 외쳤다. ..